[새벽 돋보기] 효孝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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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돋보기] 효孝 外

최규리기자 기사등록일 :
[새벽 돋보기] 효孝 外


<효孝>


孝자는 늙을 노耂자와 아들 자子가 결합한 모습이다. 아들이 노인을 업었다는 의미다. 명심보감의 기록을 본다. 孝子之事親也 居則致其敬 養則致其樂 病則致其憂 喪則致其哀 祭則致其嚴 효자지사친야 거즉치기경 양즉치기락 병즉치기우 상즉치기애 제즉치기엄 “효자는 부모님을 섬길 때 집에서는 공경을 다하고, 봉양은 즐거움을 다하며, 병들면 근심을 다하고, 돌아가시면 슬픔을 다하고, 제를 지낼때는 엄숙함을 다한다.”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다할 치致다. 인간관계는 가정에서 시작된다. 자녀가 부모와 동거하면서 진실된 마음이 없다면 사회생활도 가식에 치우칠 뿐이다.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능력 보다 진실이다. 처세적 능력이 있어도 인간적 진실이 없으면 부모를 버리는 요즘 세태다.

불경의 가르침을 보면, “공경할 만한 이들을 공경하고, 스스로 겸손하며, 만족할 줄 알며, 은혜를 잘 갚을 줄 알고, 마땅한 때에 법문을 듣는 이 다섯 가지를 갖추는 것, 그것이 최상의 행복이다”고 설파한다. 공경할 만한 이들은 단연 부모이다. 부모 공경을 최상의 행복이라 했다. 이같은 최상의 행복은 ‘망갈라경’에 자세히 기록돼 있다. “어머니 아버지를 잘 섬기고, 배우자와 자녀들을 잘 보살피며, 번뇌에 구속되지 않는 평온한 일을 하는 것”이 최상의 행복이라고 거듭 강조한다. 불경은 열반을 성취하는 수행의 과정과 동일선상에 ‘효’를 제시하고 있다. ‘효’가 단순히 개인적인 윤리에 국한되지 않고, 최상의 수행, 최상의 실천원리가 되는 것이다. 즉 열반을 이루는 지고至高의 목표로 제시되는 것이다.

성경도 효를 하나님 안에서의 인간관계 중 제1로 삼는다. 십계명이 그것이다. 히브리말로 아쉐레트 하드바리임에서 열이라는 에세르가 복수로 아쉐레트로 쓰였다. 하드바리임이 복수 즉 계명들이다. 헬라어로는 데카로그이다. 십계명 중 전반부는 하나님과의 관계 후반부는 인간관계이다. 인간관계 중 제일 먼저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명령이 나온다. 마태복음 19장 19절에서는 예수께서 십계명을 직접 열거하셨다. 언급하시면서 특히 인간관계만을 열거하신 것이 특이한다. 말미에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고 선포하셨다. 당시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믿는다하면서 형식적으로 하나님께 대한 경배에만 몰두하고 주변 사람은 도외시하는 그릇된 의식을 깨우치기 위함으로 여겨진다. 즉 예수님은 부모공경 이웃사랑이 곧 하나님 사랑임을 강조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요지경>


요지경瑤池鏡은 장난감이다. 렌즈를 통해 그 안의 사진 그림 등을 돌려가며 보는 것이다. 인터넷을 통해 들여다보는 세상은 ‘요지경 세상’이다. 얼마전 보도에 따르면 공사대금 26억원을 지급하지 않은 혐의로 재판을 받은 시행사 대표가 무죄를 선고 받았다.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식이다. 이 사건에 연루돼 돈을 떼인 50대 가장은 극단적 선택을 했다. 재판부는 "공소사실이 입증되지 않아 무죄"라는 판결이다. 민간은 누구를 탓해야 할까? 재판부일까? 검찰일까? 요지경 속은 이러하다.

전주지법 형사부는 특정 경제 범죄 가중 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기소된 시행사 대표 A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A씨는 2019년 12월부터 2020년 4월까지 전북 전주의 한 빌라 공사에 참여한 지역 중소업체 여러 곳에 약 26억원 상당의 공사대금을 지급하지 않은 혐의로 기소됐다. 그러나 공사 대금 지급은 늦어졌다. 이 사건으로 공사장 폐기물 수거 대금 6천만원을 떼인 50대의 B씨가 몸에 스스로 불을 붙여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B씨는 슬하에 미성년 세 남매를 두고 있어 안타까움을 더했다.

검찰은 수사를 벌여 A씨를 구속기소 했으나 재판부의 판단은 달랐다. 재판부는 "피고인에게 책임을 물으려면 피고인이 시공사에 대한 우월적 의사 지배의 위치에 있어야 하고, 피고인이 시공사를 통해 피해자들을 속인 점이 인정돼야 한다"며 "검사가 제출한 증거만으로는 이 부분의 공소사실을 인정하기 부족하다"고 판시했다.

다만 재판부는 횡령 혐의만 유죄로 인정됐다. 법률소비자는 누구를 탓하겠는가? 법은 법대로 흘러갈 뿐이다. 공을 서로 주고 받는 핑퐁게임처럼 재판부와 검찰의 어느 한쪽이 우세할 수 밖에 없다. 그 틈바구니에서 피해자는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일이 다반사다. 법은 법대로 세상은 세상대로 요지경 속처럼 장난감 돌아가듯 돌고돈다.


<양자역학, ‘기적’은 당연>


우리가 모래사장을 멀리서 바라본다고 하면 모래사장의 표면은 연속적으로 보인다. 만약 우리가 점점 모래사장에 가까이 다가가 모래사장을 관찰한다면 모래사장의 표면은 불연속적으로 관찰될 것이다. 거시세계에서 특정 물리량을 관찰하면 그것이 연속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미시세계에서 관찰하면 불연속성이 보인다. 이러한 미시세계를 다루는 것이 양자역학이다.

양자역학은 '아무리 기이하고 터무니없는 사건이라 해도, 발생 확률이 0이 아닌 이상 반드시 일어난다'는 물리학적 아이디어에 기초했다. 양자역학이 막 탄생되던 때 그것을 비판하기 위한 실험이 있었다. 그것이 '슈뢰딩거의 고양이'라고 불리는 사고 실험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시간이 지나자 양자역학을 비판하려던 실험은 양자역학을 설명하는 모범 사례가 됐다. 이 슈뢰딩거의 고양이 실험을 요약하면 상자 안의 고양이가 1시간 뒤 절반의 확률로 살아남을 수 있고, 나머지 절반의 확률로 죽는다. 문제는 양자역학의 해석에 따르자면 이 고양이의 생사 여부를 확인해보기 전까지는 이 고양이의 상태를 살아있으면서도 동시에 죽어있는 상태라고 규정하는 것이다.

이같은 주장은 당시 물리학계에서도 터무니없는 것으로 받아들여졌고, 실제로 슈뢰딩거도 이를 통해 양자역학을 비판하기 위해 제안했지만 결국 양자역학 입장에선 그 실험의 결론이 구구절절이 옳은 말일 뿐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비유로 쓰이게 됐다. 즉 세상이 바뀐 것이다. 이제 양자역학은 현대물리학의 기본이 됐다.

‘빛이 파동인가? 입자인가?’ 물리학계의 역사적 논쟁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어느 하나가 아닌 ‘둘 다이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빛이 그러하듯 만물도 그러하다. 사람도 예외가 아니다. 우리는 ‘파동인 동시에 입자’다. 예로부터의 기적은 이제 더 이상 기적이 아니다. 엄밀히 말하면 ‘모든 것이 기적’이다. 성경에서 예수님이 ‘이 산을 향해 땅에서 들려 바다에 빠져라‘는 말씀이 열린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