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전쟁사] 1939 09 01 제2차 세계대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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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전쟁사] 1939 09 01 제2차 세계대전(2)

함용남 기사등록일 :
(1)에서 계속.
전쟁 시작시, 대부분의 지휘관들은 적 탱크보다 더 우수한 탱크를 충족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 아이디어는, 방어력이 약한 경전차가 초기 대포 성능 저하에 의해 도전되었으나, 독일에는 전차-전차전을 채택했다. 이것은, 독일의 육군 결합 사용과 함께 폴란드와 프랑스 전역에서 승리할 수 있는 요인이었다. 대부분의 대전차전에는, 간접 사격, 대전차포, 대전차 지뢰, 원거리 보병 무기나 다른 전차 등이 사용되었다. 대규모의 기계화와 함께 보병은 군사의 기반을 유지하고, 제1차 세계 대전을 통해 대부분의 보병은 비슷하게 구현되었다. 휴대용 포가 개발되면서, 독일의 MG 42같이 도시나 정글 전투에 적합한 기관단총이 활성화되었다. 돌격소총은 전쟁 말 기관단총과 라이플의 많은 기능을 결합하며 대부분의 보병에서 보편적인 무기가 되었다. 대부분의 주요 교전국은 보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암호학의 코드북이나 독일의 에니그마처럼 암호화 기계를 이용했다. SIGINT(신호정보수집)은 해독의 계산 과정이었고, 유명한 예제로는 연합국이 일본 해군 코드북의 해독과 영국의 울트라로, 울트라는 폴란드의 암호화 사무국의 해독 방법이 영국으로 넘어간 것으로 전쟁 전 7년 동안 에니그마의 해독 방법은 수수께끼였다. 군사적 정보의 다른 이용으로는 기만 작전으로, 이를 극대화하기 위한 민스미트 작전과 보디가드 작전이 있었다. 전쟁 중이나 전쟁 후 달성된 기타 기술이나 공학으로는 전쟁 중 최초로 개발된 컴퓨터인 Z3, 콜로서스, 에니악이 개발되었고 유도 미사일과 현대적인 로켓, 핵무기 개발을 위한 맨해튼 계획, 운용 과학의 개발과 인공 항구 개발, 영국 해협의 해저 파이프관 건설 등이 있다. 이탈리아의 경제학자 프랑코 모딜리아니는 전후 전쟁에 대한 공포로 사람들이 대규모 자본 축적이 필요없다는 생각을 갖게함과 동시에 마음만 먹으면 단기간 내에 자본 축적이 가능하리라는 생각을 갖게했다고 보고 이런 경향이 2차 세계대전 이후 낮은 경제 성장율에 기여했다고 주장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세계대전 이후 복구 사업의 과정에서 정책의 근거를 마련해야 할 필요성이 증가함에 따라 정책의 증거기반주의에 영향을 주었다고 보기도 한다. 독일은 베르사유 조약으로 말미암아 무기 개발 금지와 국방군 제한 등을 당하였으므로, 다수의 무기 개발이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전에 소련에서 비밀리에 이루어졌는데, 히틀러의 집권 이후 공공연하게 베르사유 체제의 철폐가 주장되고 히틀러의 반공 정책으로 관계가 소원해지면서 협력 관계가 청산되었다. [咸龍湳 世界戰爭 CREAT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