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전쟁사] 1939 09 01 제2차 세계 대전(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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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전쟁사] 1939 09 01 제2차 세계 대전(1)

함용남 기사등록일 :
제2차 세계 대전(World War II)은 1939년 9월 1일부터 1945년 9월 2일까지 치러진,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인명 피해와 재산 피해를 남긴 파괴적인 전쟁이다. 통상적으로 전쟁이 시작된 때는 1939년 9월 1일 새벽 4시 45분 아돌프 히틀러가 다스리는 나치 독일군이 폴란드의 서쪽 국경을 침공하고, 소련군이 1939년 9월 17일 폴란드의 동쪽 국경을 침공한 때로 본다. 그러나 또 다른 편에서는 1937년 7월 7일 일본 제국의 중화민국 침략, 1939년 3월 나치 독일군의 프라하 진주 등을 개전일로 보기도 한다. 1945년 8월 6일과 8월 9일, 일본 제국 히로시마 시와 나가사키 시에 미국의 원자폭탄 투하 이후 8월 15일 일본 제국이 무조건 항복하면서 사실상 끝이 났으며, 일본 제국이 항복 문서에 서명한 9월 2일에 공식적으로 끝났다. 이 결과로 동아시아에서 일본의 식민지로 남아 있던 지역들이 독립하거나 모국으로 복귀하고, 그 외에도 여러 제국들의 식민지가 독립하게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의 전사자는 약 2,500만 명이고, 민간인 희생자도 약 3천만 명에 달했다. 2차 대전 발발전, 일본 제국은 1937년 중국 침략 때 난징 등에서 대학살을 감행하여 겁탈과 방화를 일삼으며 수십만 명의 난징 시민을 무자비하게 살해하였고, 전쟁 기간 중 포로 학살 등 여러 전쟁 범죄를 저질렀다. 또한 나치 독일은 ‘인종 청소’라는 이유로 수백만 명 이상의 유대인을 학살하였다. 미국은 1945년 3월 10일 일본의 수도 도쿄와 그 주변 수도권 일대를 소이탄으로 대규모로 폭격한 이른바 도쿄 대공습을 감행해 민간인 15만 명을 살상했고, 같은 해 8월 6일과 9일에 각각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 폭탄 공격을 감행하여 약 34만 명을 살상하였고, 영국 공군과 미국 육군항공대는 드레스덴 폭격과 뮌헨 공습을 감행하여 각각 20여만 명을 살상하는 등, 전쟁과는 상관없는 민간인들의 피해도 매우 심했었다. 전쟁은 크게 서부 전선, 동부 유럽 전선과 태평양 전쟁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외에도 아메리카, 오세아니아, 아프리카, 중동, 대서양 해역과 인도양 해역 등에서 벌어진 기타 하위 전선도 2차 대전의 전역에 포함된다.

일반적으로 개전일은 1939년 9월 1일 독일의 폴란드 침공과 이틀 후 영국과 프랑스의 선전 포고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개전일의 또 다른 해석으로는 중일 전쟁의 시작인 1937년 7월 7일로 보기도 한다. 다른 개전일로는, 영국의 역사학자인 A. J. P. 테일러가 중일 전쟁과, 유럽 및 그 식민지들의 두 전쟁이 합쳐지는 1941년으로 보기도 한다. 때로는,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이 시작된 1935년 10월 3일을 개전일로 보기도 한다. 이 문서에서는 기존의 학설인 1939년 9월 1일을 개전일로 정한다. 종전일의 정확한 날짜도 합의되지 않았다. 이는 일본 제국의 공식적인 항복일인 1945년 9월 2일보다는 휴전 협정을 체결(대일전 승전기념일)한 1945년 8월 15일을 종전일로 보기 때문이고, 일부 유럽에서는 유럽에서의 승리의 날인 1945년 5월 8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은 1951년까지 체결되지 않았고, 독일에 관한 최종 합의 강화조약은 1990년 2+4 조약까지 체결되지 않았다. 제1차 세계 대전은 이전의 전쟁과는 다르게 정치지도를 크게 변경시켰는데,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오스만 제국을 포함한 동맹국의 패배로 인한 해체가 일어났고 1917년 러시아 제국에서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났다. 한편, 프랑스, 벨기에, 이탈리아, 그리스, 루마니아 같은 기존의 연합국은 영토를 얻고, 1917년에는 러시아 제국, 1918년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1922년에는 오스만 제국이 각각 붕괴하면서 멸망하였다. 태평양 운동에도 불구하고, 제1차 세계 대전의 영향으로 인해 민족 통일주의자와 보복주의자들에게 민족주의는 유럽에서 중요한 요소로 꼽히게 되었다. 민족 통일주의와 보복주의 때문에 베르사유 조약에서 독일은 중대한 영토, 식민지, 경제적 손실을 입게 되었다. 조약에 따라 독일은 본토의 13%의 손실과 독일 제국의 식민지를 모두 잃고, 독일 민족 영토의 합병은 금지되었고 배상금이 부과되며 군사의 양과 역량은 제한되었다. 한편, 적백 내전에서 볼셰비키가 승리하며 소련이 탄생하였다. 독일 11월 혁명으로 인해 독일 제국이 해산한 후, 민족주의 정부인 바이마르 공화국이 들어서게 된다. 제1,2차 세계 대전의 사이 기간 동안 새로운 공화국에서는 우익과 좌익의 정치 대립이 심해지고 있었다. 협상국인 이탈리아는 약간의 영토 획득은 있었지만, 이탈리아 민족주의자들은 런던 조약에서 약속했던 영토를 주지 않자 반영국, 프랑스 감정이 심해지게 되었다. 1922년부터 1925년까지, 베니토 무솔리니가 이끄는 파시스트는 민주주의를 폐기하고 전체주의자, 국가주의자, 고위 협력자들을 장악했으며 사회주의자, 우익과 자유주의자는 억압하며 세계적으로는 이탈리아 제국을 표방하는 공격적인 외교 정책을 추구했다. 독일에서는, 아돌프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당이 독일 파시스트 정부를 수립했다. 세계 대공황으로 인해, 나치당의 지지도는 올라가고 1933년에는 히틀러가 독일의 수상에 임명되었다. 독일 국회의사당 방화사건 이후, 히틀러는 나치당이 이끄는 전체주의 국가를 만들었다.
 
중국 국민당은 1920년대 중반 지역 군벌의 토벌과 통일 중국을 목표로 북벌을 시작하지만, 중국 공산당과의 대립으로 인해 국공 내전이 시작된다. 1931년, 점점 군국주의로 기울어지는 일본 제국은 계속 중국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일본 정부의 아시아 지역 지배의 첫 단계로, 만주 사변을 구실로 만주를 침공하며 괴뢰국인 만주국을 세웠다. 일본에게 저항을 할 수 없었던 중국은 국제 연맹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국제연맹이 리튼 보고서를 발표하자, 일본은 국제연맹을 탈퇴한다. 1933년 동안, 만리장성과 러허성으로 간간히 전투를 진행하며 중국과 일본은 탄구 평화 협정을 맺었다. 이후, 중국 자원군 세력은 만주국 저항전과 내몽골 저항전으로 계속 전투를 이어갔다. 또한 한국 독립군도 중국 국민당을 지원했다.
 
아돌프 히틀러는 1923년 독일 정부를 전복하는데 실패했으나, 1933년에는 아돌프 히틀러의 권력 상승이 이어졌다. 그는 민주주의를 폐지하고, 새 질서를 옹호하며 독일 재무장을 시작했다. 한편, 이탈리아는 프랑스와의 동맹을 위해 에티오피아를 해방하며 이탈리아의 식민지를 해방시켰다. 1935년에는 독일이 자르 지역을 합병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며, 독일의 재무장을 공개했다. 프랑스에게 독일을 제재하는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의 스트레사 체제는 희망이었다. 소련은 드랑 나흐 오스턴으로 인해 프랑스와 상호 협정을 맺었다. 그러나 프랑스-소련 조약이 통과되기 위해서는 국제 연맹의 허가를 받아야 했고 이것이 스트레사 체제의 근본적인 문제점으로 떠올랐다. 1935년 영국에서 독일과 영국-독일 해군 협정을 맺으면서 해군의 규제가 완화되었다. 미국은 유럽과 아시아의 일련의 사건에 관심을 기울이며 중립법을 통과시킨다. 10월에는 이탈리아가 에티오피아를 침공하고 독일은 이탈리아를 지원하는 유일한 주요 유럽 국가였다. 하지만, 이탈리아는 이후 오스트리아를 흡수하는 독일에게 이의를 걸었다. 히틀러는 베르사유와 로카르노 조약을 깨며 1936년 3월 7일 라인란트를 점령한다. 그는 다른 유럽 국가로부터 작은 반발을 불러왔다. 7월에 스페인 내전이 일어나자 히틀러와 무솔리니 등 파시스트는 프랑코 정권을 지원하고, 소련은 스페인 제2공화국을 지원했다. 양측 모두 전쟁에서 새로운 무기와 기술을 시험하며, 1939년 초에 프랑코가 승리한다. 1936년 10월에는 독일과 이탈리아가 로마-베를린 축을 공개한다. 한달 뒤, 독일과 이탈리아가 체결한 방공 협정에 일본이 합류한다. 중국에서는, 시안 사건 이후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 간 제2차 국공 합작을 시작한다.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은 이탈리아 왕국과 에티오피아 제국간의 식민지 전쟁으로, 1935년 10월에 시작해서 1936년 5월에 끝났다. 이 전쟁은 에티오피아를 점령 및 병합으로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AOI)가 점령지 관리를 맡게 되었으며, 이는 국제 연맹에서 이탈리아가 약점을 노출하게 되었다. 이탈리아와 에티오피아는 모두 국제 연맹의 회원국이었으나, 국제 연맹 규약 제10조를 어겼어도 연맹은 제재하지 않았다.

독일과 이탈리아는 스페인 내전에서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이끄는 스페인국을 지원했다. 소련 등의 사회주의 세력은 좌익 성향인 기존 정부 스페인을 지원했다. 독일과 소련은 대리전으로 각자의 무기와 기술을 시험해볼 수 있었다. 1937년 4월 프랑코군에 의해 고의적인 게르니카 폭격 사건이 일어나자, 다음 전쟁에서 민간인에 대한 광범위한 테러나 폭격에 대한 우려가 상승했다.

1937년 7월, 일본군은 루거우차오 사건으로 옛 중국의 수도인 베이징을 점령하자, 중국과 일본과의 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소련은 신속히 중국-소련 불가침 조약을 체결하고 군수품을 지원하고, 독일과의 협력 협정인 중국-독일 협력은 종료되게 된다. 대원수 장개석을 포함하여 독일 훈련 중국 국민당 군이 상하이를 방어하지만, 3달 만에 상하이를 점령당했다. 일본은 중국을 계속 점령하고, 난징 전투의 일본군 승리 후 난징 대학살이 발생한다. 1938년 6월, 일본의 진출은 1938년 황하 홍수로 저지되고, 이 시간동안 우한 시의 우한 전투까지 방어할 시간을 벌게 되었다. 이 전쟁에서 일본이 군사적으로 승리했으나, 중국 정부는 수도를 내륙인 충칭으로 이전하고 일본이 바란 중국의 붕괴 대신 치열한 저항이 계속되었다. 1938년 7월 29일, 일본의 소련 침공으로 하산 호 전투가 발생하였다. 전투는 거의 소련군의 승리였으나, 일본군은 무승부로 판단하고 1939년 5월 11일에는 강제로 할힌골 전투를 일으키며 몽골 영내로 진군했다. 초기에는 몽골로의 침공이 성공했으나, 붉은 군대에 의해 관동군은 큰 피해를 입었다. 이러한 충돌들은 소련이 중국에 대한 간섭을 막기 위해 소련 정부를 회유하고 대신 남쪽으로 진출해야 한다는 일본 정부의 파벌들이 태평양과 미국 방면으로의 진출을 설득하게 되고, 또한 나중에 모스크바 공방전 당시 게오르기 주코프가 활약함으로써 원수로 등극하게 된다.

유럽에서는, 독일과 이탈리아가 대담해지고 있었다. 1938년 3월, 독일은 오스트리아 병합을 하며 다른 유럽 국가의 유화 정책을 자극했다. 이에 격려되어, 히틀러는 주데텐란트에서 독일인의 병합을 주장하면서, 곧 프랑스와 영국은 뮌헨 협정으로 체코슬로바키아의 독일 소수민족이 거주하고 있는 많은 영토를 독일에게 할양하고 인정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1차 빈 협정을 체결하며 체코슬로바키아의 나머지 영토를 폴란드와 헝가리에게 양도했다. 1939년 3월, 독일이 체코슬로바키아의 나머지 부분을 침공하며 독일은 모라바 보호령과 슬로바키아 공화국으로 나누어 점령했다. 히틀러는 또한 그단스크 자유시 할양을 요구하자, 이에 놀란 프랑스와 영국은 폴란드-영국 방위 협정으로 폴란드의 독립의 지원을 보장하고, 1939년 4월 이탈리아가 알바니아를 병합하자 이 보장을 루마니아와 그리스로 확대했다. 곧 프랑스-폴란드 동맹을 맺으며 영국-폴란드-프랑스 동맹이 형성되자, 독일과 이탈리아는 강철 조약으로 동맹을 공식화했다. 1939년 8월, 독일과 소련은 독일-소련 불가침 조약을 맺고 비밀 조약과 함께 조약을 맺었다. 양 국은 서로 "영토와 정치적 영역의 재정리"와 "영향 구역"을 정했다.

1939년 9월 1일, 독일과 슬로바키아가 그리고 소련이 폴란드 침공을 시작했다. 9월 3일, 프랑스와 영국, 영연방 국가가 독일에게 선전포고를 하지만, 가짜 전쟁이 발발하고 서부에서의 공세는 소규모의 자르 공세밖에 없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의 전쟁 능력을 감소시키기 위해 9월 3일 해군을 이용한 독일의 봉쇄가 시작됐다. 9월 17일, 소련-일본 국경 충돌 이후 소련이 폴란드 침공을 시작했다. 이후 폴란드는 독일과 소련이 병합하고, 리투아니아와 슬로바키아도 일부 영토를 얻었다. 폴란드는 항복하지 않고 폴란드 망명 정부를 세우며 폴란드 국내 군을 통해 모든 외부 전선에서 연합군과 공동으로 전투를 하였다. 약 10만 명이 루마니아와 발트 국가로 망명하고, 이들 대부분은 나중에 폴란드 서부 군과 합류한다. 폴란드의 애니그마 암호해독가도 프랑스로 망명했다. 이 기간 동안, 일본은 전략적으로 중요한 도시인 창사에 대한 첫 공격을 실시하지만 9월 하순까지 점령하지 못했다. 폴란드 침공 이후, 독일-소련 협력, 우호 및 경계 조약에서, 소련은 발트 국가들을 점령하고, 핀란드는 영토 요구를 거부하자 1939년 11월 소련이 핀란드에게 선전포고하며 겨울 전쟁이 발발한다. 겨울 전쟁은 1940년 3월 핀란드가 영토를 10% 할양하는 조건인 모스크바 평화 조약으로 끝난다.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과 전쟁하는 나라를 지원한 것처럼 소련에게 공격받은 핀란드를 지원하고, 국제 연맹에서 소련 침공에 대해 소련을 제명시켰다.
 
서부 유럽에서는, 프랑스에 영국 원정군이 상륙하고 나서 1940년 4월 가짜 전쟁이 끝나면서 베네룩스와 프랑스를 상대로 프랑스 공방전이 시작된다. 소련과 독일은 통상 조약을 맺고, 소련은 연합군의 봉쇄를 우회하기 위해 독일에게 원자재를 주는 대가로 독일 군사 장비와 산업 장비를 얻었다. 1940년 4월, 독일이 스웨덴산 철광석을 확보하기 위해 베저위붕 작전을 시행하고, 연합군도 윌프레드 작전을 시작했다. 덴마크는 즉시 항복하고, 노르웨이는 연합군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2개월 이내에 항복했다. 1940년 5월, 독일의 아이슬란드 점령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영국이 아이슬란드를 침공한다. 또한, 노르웨이 전역의 영국 불만으로 인해 영국에서는 1940년 5월 10일 총리가 네빌 체임벌린에서 윈스턴 처칠로 교체되었다. 독일은 1940년 5월 10일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를 침공했다. 전격전 전술로 인해, 네덜란드는 5일, 벨기에는 2주 내에 점령되었다. 프랑스의 두꺼운 마지노 선 방어는 아르덴 지역의 두꺼운 숲의 측면 공격으로 붕괴되고, 이 실수는 프랑스가 자연적 방어 지역으로 많은 병력을 두지 않아 발생했다. 결국 프랑스 전역은 양분되고, 6월 초순에는 영국군은 다이나모 작전으로 중장비를 버리고 강제적으로 철수한다. 6월 10일, 이탈리아가 프랑스를 침공하며 프랑스와 영국에게 선전포고한다. 12일 후, 프랑스가 항복하며, 프랑스는 독일 점령 영역과 이탈리아 점령 영역, 그리고 리브레 영역인 비시 프랑스로 나뉘었다. 7월 3일, 영국이 프랑스 제국의 식민지인 알제리의 프랑스 함대를 공격하며 가능한 한 일어날 수 있는 저항을 줄였다. 6월, 프랑스 전투의 나머지 기간 동안 소련은 발트 3국을 점령하고, 루마니아와의 분쟁지역인 베사라비아를 점령했다. 한편, 나치-소련은 정치적, 경제적 협력을 지속하지만 협력은 점차 지연되며, 양국은 전쟁을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프랑스가 무력화된 후, 독일은 영국 침공 전 제공권을 장악하기 위해 영국 본토 항공전을 시작했다. 전투는 실패하고, 작전은 9월에 취소되었다. 새로 점령한 프랑스 항구를 이용하며, 독일 해군은 지나치게 확장한 영국 해군을 상대로 U-보트를 이용하며 대서양 전투에서 1940년 6월부터 1941년 2월까지 소위 "행복한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이탈리아는 지중해에서 작전을 시작하며, 6월에 몰타 공방전, 8월에 영국령 소말릴란드 침공, 그리고 1940년 9월에는 이집트 침공을 시작한다. 일본은 중국으로 인한 봉쇄가 심해지자, 인도차이나를 침공하며 북양정부은 북부에서 고립되었다.
 
이 기간 동안 중립적인 미국은 중국과 서방 연합국을 도우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 1939년 11월 미국 중립법이 약화되어 캐시앤캐리 제도를 허용하도록 바뀌었다. 1940년, 독일의 파리 점령에 이어, 2대양 해군법으로 크게 성장한 미국 해군은 일본의 인도차이나 침공 이후 미국은 철, 철강 및 기계부품에 대한 엠바고를 시작했다. 9월, 미국과 영국은 영국 기지에 대한 구축함 교환 협정이 체결되었다. 그럼에도, 1941년에도 미국인들의 대다수는 전쟁의 직접적인 참전을 거부했다. 1940년 9월, 독일, 이탈리아, 일본 간에 삼국 동맹 조약이 체결되었다. 삼국 동맹 조약은 소련을 제외한 모든 추축국 국가들을 공격하지 않는다는 협정이다. 이 기간 동안, 미국은 무기 대여법으로 철강 및 기타 품목을 수출하며 영국과 중국을 지원하고, 대서양의 약 절반을 보안 영역으로 하여 미국 해군이 영국의 무역선을 보호하게 했다. 그 결과, 독일과 미국은 1941년 10월 미국은 공식적으로 중립이었으나 북부와 중부 대서양에서 해상 전쟁이 지속되었다. 1940년 11월에는 추축국 중 헝가리와 슬로바키아, 루마니아가 삼국 동맹 조약에 가입했다. 1940년 10월, 이탈리아가 그리스를 침공하지만, 곧 교착 상태가 되며 그리스가 알바니아로 공세를 펼쳤다. 1940년 12월, 영연방군은 반격을 시작하며 북아프리카와, 동아프리카에서 전진을 시작했다. 1941년 초, 이탈리아군이 리비아 내로 후퇴하자, 처칠은 그리스를 방어하기 위해 북아프리카의 병력을 그리스로 증원했다. 이탈리아 해군은 영국 해군에 의해 타란토 전투에서 3척의 전함을 잃고, 캐이프 마타펜 전투에서 다른 함선도 더 잃었다. 독일은 곧 이탈리아를 돕기 위해 개입했다. 히틀러는 2월에 북아프리카에 병력을 증원하고, 3월 말부터 영연방군 영토로 공세를 시작했다. 한 달 전에는, 영 연방군이 토부룩 공방전에서 고립된 항구를 향해 이집트로 후퇴했다. 영연방은 5월과 6월에 공세를 시도했으나 두번 다 실패했다. 4월 초, 불가리아가 삼국 동맹 조약에 가입하고 독일군은 그리스 공방전과 유고슬라비아 침공으로 발칸 반도에 개입하며, 5월 말 크레타 전투로 발칸반도에서 연합군 세력을 완전히 밀어냈다. 연합군은 이 기간 동안 일부 승리한 곳도 있었다. 중동에서, 영연방군은 첫 번째로 영국-이라크 전쟁에서 이라크가 프랑스 위임통치령 시리아로 독일군의 증원을 받자, 자유 프랑스의 도움으로 시리아와 레바논을 점령하고 이라크도 점령한다. 대서양에서는, 영국군이 마지막 전함 비스마르크 해전에서 비스마르크를 격침시켰다. 아마도 가장 중요한 사건은,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영국 공군이 승리하여 독일의 항공 전역은 1941년 5월에 끝난 것이다.
 
아시아에서는, 중일전쟁이 양측이 공격적으로 나감에도 불구하고 1940년대에는 교착 상태였다. 자원 공급 경로를 차단하여 중국을 압박하나, 서방군의 능력은 더 높았기 때문에 일본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침공하고, 그 해 8월에는 중국 공산당이 백연대 공세에 승리하자 일본은 보복으로 삼광작전을 펼치며 점령 지역에서 모든 가용자원을 약탈했다. 중국의 지속적인 공산주의와 민족주의의 충돌은, 신사군 사건으로 협력이 중단된다. 유라시아의 상황은 비교적 안정되어 일본, 독일, 소련은 전쟁 준비를 시작했다. 동남아시아의 풍부한 자원을 이용하기 위한 독일과 일본의 계획에 소련이 긴장하여, 1941년 4월 소련과 일본은 소비에트 연방-일본 중립 조약을 체결한다. 반대로, 독일은 꾸준히 소련 국경의 독일군을 늘려가며 소련 침공 준비를 하고 있었다. 1941년 6월 22일, 독일은 소련을 침공하는 바르바로사 작전을 시작한다. 이 공세의 주요 표적은 발트 지방, 모스크바와 우크라이나였고, 전략적 목표는 1941년 중에 아르한겔스크-아스크라한 선으로 카스피 해와 백해를 연결하는 것이었다. 히틀러의 목적은 군사적으로 소련과 공산주의를 제거하여 제네라플랜 오스트를 통해 레벤스라움을 이루는 것이었고, 그리고 독일의 남아있는 적을 이기기 위한 전략적 자원을 얻기 위해서였다. 비록 붉은 군대는 전쟁 전에 반격을 준비했으나, 바르바로사는 소련 최고 명령부에게 강제로 전략적 방어를 하게 했다. 여름 동안, 추축국은 소련의 영토로 상당한 이익을 얻었으나 인력과 자원 모두 많은 손실을 입었다. 그러나 8월 중순 동안 독일 오베르코만도 데스 헤레스는 1차 스몰렌스크 전투 동안 중앙 집단군의 인력이 상당히 고갈되어 공세가 중단되고, 그리고 제2 기갑군을 통해 중앙 우크라이나와 레닌그라드의 공세를 강화한다. 1차 키예프 전투에서 소련의 4개 군이 포위되고 제거되어 압도적인 성공을 거두고, 그리고 추가적으로 크림 전역과 동부 우크라이나 전투(1차 하리코프 전투)을 시행했다. 추축국의 병력 중 삼분의 일과 지중해의 항공 세력의 대부분은 동부 전선으로 이동하여, 영국은 대전략에 대해 재고하게 되었다. 7월, 영국과 소련은 반독일에 대해 동맹을 맺었다. 영국과 소련은 이란 침공으로 페르시아 회랑과 이란의 유전을 확대했다. 8월, 영국과 미국은 공동으로 대서양 헌장을 발표했다. 루마니아는 공헌으로 소련에게 영토를 할양하고 지도자 이온 안토네스쿠는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욕망을 가졌다. 10월, 추축국은 우크라니아와 발트 해에서 레닌그라드 포위전과 세바스토폴 포위전으로 목표 영역을 달성하고, 주요 전투로 모스크바 공방전이 시작되었다. 치열한 전투가 이어지고 2개월 후, 독일군은 모스크바 외곽에 매우 지친 상태로 도달했고, 그들은 공세를 중단했다. 추축국은 매우 큰 영토적 이익을 얻었으나, 그들은 주요한 목표인 두 가지 핵심 도시인 레닌그라드와 모스크바는 얻지 못했고, 소련은 군사적 저항을 잃지 않고 군사력 잠재력이 많이 남아 있었다. 전격전은 유럽에서의 단계가 끝났다.
 
12월 초, 갓 동원된 예비 병력은 소련과 추축국과의 수적 병력을 비슷하게 만들었다. 이 뿐만 아니라, 조르게의 정보로 일본의 관동군은 공격을 하지 않는다는 믿음으로 극동의 병력을 유럽으로 옮기고 소련은 이 병력으로 대 반격으로 12월 5일 1000 km 길이에서 서쪽으로 100–250 km 밀어냈다. 유럽에서 독일의 성공으로, 일본은 동남아시아에서 유럽 정부에 압력을 가했다. 네덜란드는 네덜란드령 동인도에서 석유를 공급하기로 합의하나, 식민지의 통제를 넘기는 것에는 반대했다. 반면에, 비시 프랑스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넘기는 데 동의했다. 1941년 7월, 미국, 영국과 기타 서양 국가들은 인도차이나 점령에 대응하여 일본 자산에 대한 동결과 일본 석유 공급의 80%를 차지하는 미국의 석유 금수 조치를 시행했다. 즉, 일본은 중국과의 전쟁으로 이루어내는 아시아 정복 포기의 선택을 강요받았고, 일본은 아니면 강제로 천연 탈취를 선택받은 상황에서 일본군은 석유 금수 조치는 전쟁 선언으로 받아들여졌다. 일본의 계획은 빠르게 중앙 태평양에 이르는 거대한 방어선을 구축한 다음, 아시아의 유럽 식민지를 점령하고 방어전을 하며 연합군이 소진되는 동안 동남아시아의 자원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경계를 무력화하고 미국의 간섭을 막기 위해 미국 태평양 함대를 파괴하려 했다. 1941년 12월 7일(아시아 시간으로 12월 8일), 일본이 미국의 진주만과 영국의 식민지를 기습 공격하여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었다. 진주만 공격 후 말레이시아 전역과 홍콩 전투가 시작되었다. 이러한 공격 후 미국, 영국, 호주와 기타 연합군은 일본에게 선전포고했다. 독일과 삼국 동맹 조약의 회원국은 미국에게 선전포고했다. 1월에는, 4대 강대국 — 미국, 영국, 소련, 중국 — 과 기타 22개 나라가 대서양 헌장에 이어 연합국 공동 선언을 발표한다. 소련은 연합국 공동 선언을 준수하지 않고 일본과 중립 조약을 유지하고, 자기 결정의 원칙에 의해 자신이 면제되었다. 1941년, 스탈린은 처칠과 루즈벨트에게 프랑스에 "제2전선"을 열라고 요청한다. 동부 전선은 유럽 전장에서 가장 큰 전역이었으며, 소련 사상자 수백만명은 연합군 몇백명에 비하면 매우 적었으나 처칠과 루즈벨트는 원하는 전선을 열기 위해 준비 기간이 필요했다.
 
한편, 1942년 4월에는 일본과 그 동맹국인 타이가 버마, 말레이시아, 네덜란드령 동인도, 싱가포르, 라바울을 점령하며 연합군에게 중대한 손실을 입혔다. 코레히도르 섬과 필리핀에서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결국 1942년 5월 점령되어 필리핀 연방은 추방되었다. 일본은 해상에도 승리를 이루어 남중국해, 자바 해, 인도양과 호주의 다윈에 공습했다. 1942년 1월 초 연합군이 승리한 전투는 오직 창사 전투뿐이었다. 일본은 준비 없는 상대로 승리했으나, 너무 지나치게 전선이 전폭 확대되었다. 독일도 주도권을 유지했다. 모호한 미국 해군의 명령 결정을 이용하여, 독일 해군은 대서양에서 2차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상당한 손실에도 불구하고, 유럽의 추축국은 중앙과 남부 러시아의 주요 소련 공격을 막고 거의 대부분의 영토 이익을 달성했다. 북아프리카에서는, 독일이 1월에 공세를 시작하여 2월 초에는 영국군을 가질라 밖으로 내보냈다. 독일의 향후 공격을 준비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전투가 중지되었다.

1942년 5월 초, 일본은 미국과 호주 사이 통신 및 무역선을 끊기 위해 포트모르즈비 점령 상륙작전을 시작했다. 그러나 연합군은 산호해 해전으로 일본 해군의 차단과 점령을 막았다. 일본의 다음 작전은 둘리틀 공습에 의해 미국의 미드웨이 환초 점령과 함께 양동작전으로 알류샨 열도를 점령하고자 했다. 6월 초순, 일본은 행동을 옮기고자 하나 미국은 일본 해군 암호를 5월 말에 깨트려 일본의 계획과 운용 방향을 알고 있었고 이는 일본 제국 해군과 미드웨이 해전에 승리하는 요소가 된다. 미드웨이 해전의 결과로 일본의 공세 감소와 함께 뒤늦게 파푸아 자치령의 포트모르즈비를 점령하기 위해 코코다 트랙 전역을 시작한다. 미국의 일본 역공 계획은 주로 동남아시아의 일본 기지인 라바울을 점령하기 위해 솔로몬 제도와 과달카날 섬 점령을 계획했다. 두 계획은 7월에 시작하지만, 9월 중순에 일본은 과달카날 전역에 우선순위가 배치되어 뉴기니의 군대는 오로 주에서 철수되고, 그 곳에서 호주와 미군과 부나-고나 전투를 치뤘다. 과달카날 전투는 곧 과달카날에 대한 병력과 보급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1943년의 시작에, 일본군은 전투에서 패해 철수한다. 버마에서, 영연방군은 두 가지 작전을 시작했다. 첫 번째 작전은 1차 아라칸 공세로 1942년 말에 시작했으나, 공세에 실패하고 인도 지역은 1943년 5월까지 휴전 상태가 된다. 두 번째 작전은 롱클로스 작전으로 일본군의 후방을 방해하는 목적으로 2월에 시작해 4월에 끝났고, 모호한 결과를 얻었다. 독일의 동부전선에서는, 추축국은 소련의 공세인 케르치 반도 전투와 2차 하리코프 전투에서 승리하고, 북부와 중앙 전선에는 유지하며 코카서스의 유전과 쿠반 강의 스텝 지역을 점령하기 위해 1942년 6월 청색 작전이 시작되었다. 독일의 남부 집단군은 둘로 나뉘어서 육군 A그룹은 돈 강을 도하하고, 육군 B그룹은 코카서스와 볼가 강으로 진격하는 것이었다. 소련은 스탈린그라드에서 방어하기로 결정하고, 이는 독일의 진격로에 있었다. 11월 중순까지 독일군은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시가전을 치르고 있었으나, 소련의 2차 겨울 공세인 천왕성 작전과 화성 작전으로 반격하나, 화성 작전은 실패한다. 1943년 2월 초, 독일 육군은 매우 큰 손실을 입으며 스탈린그라드 시내에서 항복하고 전선은 여름 공세 전으로 돌아간다. 2월 중순, 소련의 공세가 중단되자 독일군은 다시 3차 하리코프 전투에 성공하며 쿠르스크 근방에 돌출부를 형성한다.
 
1941년 11월, 영연방군은 반격 작전으로 크루세이더 작전을 시작하며 북아프리카에서 독일군과 이탈리아군이 얻은 영토를 탈환했다. 서부에서는, 일본이 마다가스카르 섬을 잠수함 기지로 사용하는 것을 막기 위해 마다가스카르 전투를 1942년 5월 초에 시작한다. 이 전투가 성공적으로 끝난 이후, 추축국은 가질라 전투에서 승리하며 1차 엘 알라메인 전투가 시작될 때 까지 진격한다. 그 동안 대륙에서는 코만도가 디에프 기습을 하나 참혹하게 실패하고, 서방 연합군의 준비, 장비, 작전 보안에 대한 부족이 드러났다. 1942년 8월, 알람 엘 할파 전투에 연합군이 승리한다. 그리고 값비싼 대가로 베데스탈 작전을 성공한다. 몇 달 후, 연합군이 제2차 엘 알라메인 전투에 성공하자 추축국은 이집트를 잃고 리비아까지 물러났다. 이 공격 후 횃불 작전으로 프랑스령 서아프리카는 연합군에 합류한다. 히틀러는 북아프리카의 배신에 대해 안톤 작전으로 비시 프랑스를 점령하고, 비시 프랑스군은 반항하지 않았으나 툴룽 프랑스 함대 자침으로 툴룽 항의 프랑스 해군은 점령되지 않았다. 아프리카의 추축군은 튀니지로 후퇴하며 1943년 5월까지 튀니지 전역이 계속되었다. 과달카날 전역에 이어, 연합군은 일본의 태평양에 대한 공세 작전을 시작했다. 1943년 5월, 알래스카의 일본군을 제거하고, 곧 주요 작전으로 카트휠 작전으로 라바울을 고립시키고 길버트와 마셜 전역으로 중앙태평양의 일본군을 제거했다. 1944년 3월 말에는, 연합군은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고 추가적으로 우박 작전으로 캐롤라인 제도의 일본 해군을 격침시켰다. 4월에는, 연합군이 서뉴기니 전역으로 뉴기니 전역을 탈환했다. 소련에서는, 독일과 소련 모두 1943년의 대형 공세에 대비해 준비를 하고 있었다. 1943년 7월 4일, 독일군은 쿠르스크 전투를 시작했다. 일주일 내에, 독일군은 소련의 강력한 방어선에 공세를 중지하고 히틀러는 전쟁에서 처음으로 작전 수행 중에 작전을 취소했다. 이 결정은 7월 9일 허스키 작전에서 이탈리아군의 실패로 인해 무솔리니가 실각하게 되어서였다.
 
1943년 7월 12일, 소련군은 쿠트조프 작전으로 반격을 시작하며 동부에서의 교착 상태를 해결한다는 희망이 있었다. 쿠르스크의 소련군 승리는 독일의 우세가 끝나고, 동부 전선에서 주도권이 소련으로 넘어간다는 것이었다. 독일군은 전선을 안정화하기 위해 급히 판저-워튼 선을 만드나, 2차 스몰렌스크 전투와 드네프르 저지 작전으로 구멍이 뚫리게 된다. 1943년 9월 초, 서부 연합군의 이탈리아 침공으로 이탈리아와 연합군의 정전 협정이 체결된다. 독일은 이탈리아 지역의 점령과 무장 해제로 대응하고, 그리고 방어선을 구축한다. G그리고, 독일군의 특수부대가 그랑 사소 습격으로 무솔리니를 탈출시키고 독일은 이탈리아에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이라는 괴뢰국을 세운다. 서방 연합군은 9월 중순 동안 겨울 선에 도달할 때 까지 전투했다. 대서양에도 독일의 작전이 있었다. 그러나 1943년 연합군의 반격 조치의 효과가 커지자, 독일 잠수함의 상당한 손실로 인해 독일 해군은 대서양에서의 작전을 중단했다. 1943년 11월, 프랭클린 D. 루즈벨트와 윈스턴 처칠은 장개석과 카이로에서 만나고, 이오시프 스탈린과 테헤란에서 회담을 가졌다. 전자의 회담은 전후 일본의 영토 분배와, 후자의 회담은 서양 연합군이 1944년에 유럽 대륙에 상륙하고, 독일 항복 3개월 내에 일본에게 선전포고하는 약속이 포함되어 있었다. 1943년 11월부터 7주간 진행된 창더 전투에서, 중국군은 연합군의 지원을 기다리는 동안 일본군과 매우 힘든 전투를 할 수 밖에 없었다. 1944년 1월, 연합군은 몬테 카시노 전투와 안치오 상륙 작전으로 이탈리아로의 진군을 시작했다. 1월 말, 소련의 3년간의 레닌그라드 포위전에 소련이 승리함으로써 독일군은 상트페테부르크에서 후퇴하고, 가장 오래된 포위전으로 남았다. 소련의 다음 공세는 전쟁 전 에스토니아 국경까지 진군하나 독일 북부 집단군에 의해 멈추고, 독일의 에스토니아 점령 기간 동안 에스토니아인들은 소련에게 에스토니아 망명정부와 민족 독립을 요구하나 실패한다. 이 정지는 발트 해 지역의 수복이 둔화되게 되었다. 1944년 5월 말, 소련은 크림 공세로 추축국은 우크라이나에서 크게 후퇴하고, 1차 이아시-키시네프 공세로 추축군은 루마니아까지 후퇴한다. 이탈리아의 연합군 공격은 계속 성공하여 독일 사단은 6월 4일에는 로마까지 후퇴했다. 연합군은 아시아 대륙에서 여러 운명을 겪었다. 1944년 3월, 일본은 첫 번째 공세로 유고 작전으로 아삼 지역에 대한 공세를 시작하고,[202] 곧이어 임팔 전투와 코히마 전투로 영연방군을 포위한다. 1944년 5월, 영국군과 한국 광복군은 반격을 시작하여 일본군을 버마 국경까지 물러나게 하고, 1943년 말에는 중국군이 북부 버마로 침공하여 미치나에서 일본군을 포위한다. 두 번째 반격인 대륙타통작전에서 일본군은 중국군의 주요 병력을 고립시키고 일본군이 점령한 철도의 연합군 비행장을 점령한다. 6월에는, 일본군은 허난 성 지방을 점령하고 창사 전투로 후난 성에 대한 반격을 시작한다.

소련의 압력을 받은 3년 후 1944년 6월 6일(흔히 D-Day라고 알려짐), 서방 연합군은 노르망디 상륙 작전으로 북프랑스를 침공한다. 그 후 이탈리아의 연합군 부대는 드라군 작전으로 남프랑스를 침공한다. 상륙 작전은 성공적이었으며, 팔레즈 포위전으로 프랑스의 독일군 대부분은 포위되었다. 8월 25일에는 자유 프랑스군이 파리를 해방하고 서방 연합군은 라인강의 공세를 시작한다. 그러나 연합군이 북부 독일로 진출하기 위해 네덜란드 공세를 펼쳤던 마켓가든 작전은 실패한다. 그 후, 서방 연합군은 천천히 독일에게 밀리고, 라인 강을 도하를 도모했던 대규모 공세도 실패한다. 또한, 이탈리아의 연합군도 고딕 선에서 독일군의 주요 방어로 인해 진격이 느려졌다. 6월 22일, 소련은 벨라루스 지역에서 독일 중부 집단군에 대한 대규모 공세인 바그라티온 작전을 시작하며 거의 대부분이 파괴되었다. 그 후, 곧 리비우-산도미에시 공세로 서부 우크라이나와 동부 폴란드의 독일군을 몰아냈다. 소련은 곧 바르샤바의 저항 조직인 폴란드 국내군에게 폴란드를 해방하라고 요청하며 곧 바르샤바 봉기가 일어나고 남쪽으로는 슬로바키아 민족 봉기가 일어나나, 소련의 도움이 없고 독일군은 곧 진압을 시작한다. 소련군은 2차 이아시-키시네프 공세로 동루마니아의 서부 우크라이나 집단군을 몰아내고 곧 루마니아와 불가리아의 쿠데타로 인해 연합군으로 돌아서게 된다. 1944년 9월, 붉은 군대는 유고슬라비아로의 공세를 시작하며 독일군은 급히 육군 E집단군과 육군 F집단군에 대해 그리스, 알바니아, 유고슬라비아에서 후퇴하게 된다. 이 시점에, 공산당 주도의 요시프 브로즈 티토 하의 유고슬라비아 파르타잔은 1941년부터 시작된 유고슬라비아 전선에서 게릴라 전투를 시작하며 유고슬라비아의 많은 영토를 점령하며 독일 남부로 공세를 시작했다. 북부 세르비아의 소련군은, 제한적으로 파르타잔을 지원하며 10월 20일 베오그라드 공세에 성공한다. 몇 일 후, 소련은 독일 점령하의 헝가리에서 부다페스트 공세를 시작하며 1945년 2월에는 부다페스트 포위전에 승리한다. 발칸 반도에서 계속적인 소련의 승리와의 달리, 계속 전쟁에서 비보르크-페트로자포츠크 공세 후 소련군이 카렐리야 지협을 점령하자 소련-핀란드는 모스크바 평화 조약으로 비교적 온화한 조건으로 정전하고, 다음으로 핀란드 본토에서 라플란드 전쟁이 발발한다. 7월의 시작에, 동남아시아의 영연방군은 일본의 아삼 포위전이 실패하고 일본군은 친드윈 강까지 후퇴하며, 중국군은 미치나를 점령한다. 중국에서는, 일본군은 큰 성공을 거두며 6월 중순에는 창사를 점령하고 8월 초에는 헝양 방어전에서 일본군이 승리한다. 그 후, 일본군은 광시 지방을 침공하며 11월 말까지 구이린-류저우 전투에 승리하고 12월 중순까지 중국과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연계되며 진격하고 있었다.
 
태평양에서는, 미군이 일본군의 영토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1944년 6월 중반, 북마리아나-팔라우 제도 공세가 시작되고 일본군은 결정적으로 필리핀 해 해전에 패배한다. 이 패배로 인해 일본 총리인 도조 히데키는 해임되고, 미군은 일본 본토를 폭격하기 위한 공군 기지를 점령하기 시작했다. 10월 말, 미군은 필리핀의 레이테 섬을 침공하고, 그 후 연합군은 레이테 만 해전에서 큰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 1944년 12월 16일, 독일은 서부 전선에서 서방 연합군을 물리치기 위해 모든 예비 병력을 모아 벌지 전투를 시작하나, 서방 연합군의 주요 보급 항구인 앤트워프 항구를 점령할 수는 없었다. 1월, 공세는 어떠한 전략적 목표로 이루지 못한 채 실패했다. 이탈리아에서는, 독일군와 연합군은 방어선 근처에서 교착 상태를 이루었다. 1945년 1월 중순, 소련군은 폴란드 지방에서 공세를 시작하며 비스툴라-오데르 공세로 독일 본토로 진격하고, 동프로이센 공세로 동프로이센를 점령했다. 2월 4일, 미국, 영국, 소련의 지도자들은 얄타 회담에서 만났다. 그들은 전후 독일 점령에 동의하고, 소련은 일본에 대한 공격을 시작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2월, 소련은 실레지아 공세와 동포메라니안 공세를 시작하고, 서방 연합군은 독일 본토로 진격하며 라인 강을 점령했다. 3월, 서방 연합군은 라인-루르의 북부와 남부를 점령하며 루르 포위전으로 B 집단군을 포위시키며, 소련은 빈 공세를 시작한다. 4월 초, 서방 연합군은 마침내 이탈리아로의 공세가 성공하며 독일 서부로 진격하며, 소련군은 4월 말 베를린 공방전을 시작하며, 4월 25일에는 연합군과 소련군이 엘베 강에서 만났다. 1945년 4월 30일, 히틀러가 지하벙커에서 애인 에바 브라운과 동반자살하였고, 5월 7일 독일 국회의사당을 방어하던 독일군이 항복하며 독일 3제국은 멸망했다. 대통령은 이 기간 동안 몇몇이 바뀌었다. 4월 12일, 미국의 대통령 프랭클린 루즈벨트가 사망하고, 해리 S. 트루먼이 대통령직을 승계받았다. 베니토 무솔리니는 4월 28일에 이탈리아 파르타잔에 의해 처형되었다. 이틀 후, 히틀러는 자살하고, 대제독 칼 되니츠가 총리를 승계받았다. 독일군은 이탈리아에서 4월 29일에 항복했다. 독일의 항복문서는 5월 7일 랭스에서 서명되었고, 5월 8일(모스크바 시간으로 5월 9일)에 베를린에 비준되었다. 독일 중앙집단군은 5월 11일 프라하 공세까지 저항했다.
 
태평양 전선에서는, 미군은 1945년 4월 말까지 필리핀에서 필리핀 전투과 레이테 만 해전에서 승리한다. 1945년 1월 루존 상륙과 3월에는 마닐라 전투가 시작되었다. 전투는 루존에서 계속되었으며, 민다나오 섬을 비롯한 필리핀의 다른 섬들은 전쟁이 끝날 때 까지 저항했다. 1945년 5월, 호주군은 보르네오 전투를 시작하며 섬을 점령했다. 영국, 미국, 중국은 북부 버마에서 일본군을 몰아내고, 5월 23일에는 영국군이 양곤을 점령했다. 중국은 1945년 4월 6일부터 6월 7일까지 서후난 전투로 반격을 시작했다. 미군은 일본 본토로의 진격을 시작하여, 3월에는 이오 섬을 점령하고, 6월 말에는 오키나와를 점령했다. 미군의 폭격기는 일본 본토 공습을 시작하고, 미군 잠수함은 봉쇄 조치를 시작했다. 7월 11일에는, 연합군의 지도자가 포츠담 회담을 했다. 그들은 독일에서 이전 회담의 협정을 확인하고, 특히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강조하며 "일본에 대한 대안은 신속하고 완전한 파괴"라고 발표했다. 이 회담 중에 영국은 선거를 시작하고, 클레멘트 애틀리 내각이 시작되었다. 일본은 포츠담 협정을 무시하며, 미국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 폭탄을 투하한다. 두 폭탄이 터진 사이, 소련군은 얄타 회담의 조건에 따라 만주 전략공세작전으로 만주로 진격하며 관동군을 항복시킨다. 그리고 소련군은 만주와 청진 등 한반도 북부를 점령한다. 또한, 소련군은 사할린 섬과 쿠릴 열도를 점령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며, 일본의 항복문서는 1945년 9월 2일 미군 전함 USS 미주리 (BB-63)에 서명되며 제2차 세계 대전은 끝났다.

소련은 1945년 8월 8일, 일본 제국에 선전포고를 한다. 소련은 현재의 일본 본토에 상륙하지는 않았으나, 만주 전략공세작전으로 일본이 점령하고 있던 만주와 한반도 북부에서 일본 세력을 축출하였다. 이로 인해 일본의 괴뢰국이었던 만주국은 멸망하고 만다. 또한 과거 러일 전쟁의 패배로 러시아 제국이 일본 제국에 할양하였던 사할린 섬 남부와 쿠릴 열도를 탈환하였다. 그리고 1945년 9월에 영국, 미국, 중화민국, 소련 등이 일본 분할 점령을 하려는 계획도 있었으나 8월 15일에 일본이 항복하는 바람에 이 모두 무산되었다.

미국과 소련이 나치 독일과 일본 제국을 패망시킨 계기로 미국을 중심으로 자유주의와 소련을 중심으로 공산주의가 발달하는 냉전이 시작되었다. 연합군은 점령한 오스트리아와 독일에 행정 기구를 설치했다. 오스트리아는 중립국이 되었고, 모든 정치 블록에 속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도이칠란트의 탈나치화의 일환으로, 뉘른베르크 재판을 통해 나치 정치와 관련된 인사를 제거하나, 이 정책은 사면으로 바뀌면서 구 나치 인사가 재결합하게 된다. 도이칠란트는 동부의 실롱스크, 노이마르크, 포메라니아 거의 대부분을 폴란드에 할양하고, 동프로이센은 소련에게 할양하며 도이칠란트는 9백만 명 이상의 독일인을 잃고, 또한 체코슬로바키아 수데텐란트의 3백만 명 이상의 독일인을 잃고, 결국 도이칠란트는 전쟁 전의 영토의 4분의 1을 잃었다. 그리고 도이칠란트는 1945년 연합군 4개국에 분할 점령당했는데 미국과 소련의 정치상 대립으로 인해 동과 서로 나뉘는 비극을 맞이하였다. 영국, 프랑스, 미국이 점령한 쪽에서는 독일 연방 공화국이, 소련이 점령한 쪽에선 독일 민주 공화국으로 탄생했으며, 베를린 위기가 벌어지고 자유를 찾아 동독에서 서독으로 탈출한 사람들이 날로 늘어가는데 1950년대에, 서독의 5분의 1은 동독에서 탈출한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소련은 베를린 장벽을 쌓고 군사를 감시하게 했다. 그리고 동유럽과 서유럽의 나머지 부분의 세력 범위도 연합군에게 점령당했다. 또한, 대부분의 동부 및 중앙 유럽의 국가들은 소련에게 점령되어 소련 당국의 지원으로 공산주의 정권이 수립되었다. 그 결과, 폴란드,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루마니아, 알바니아, 독일 민주 공화국은 소련의 위성 국가가 되었다. 공산주의 체제의 유고슬라비아는 소련과는 독립된 정책을 펼쳐 긴장을 유발했다. 이후, 티토-스탈린 결별로 유고슬라비아는 코민테른에서 제명되었다. 또한, 소련은 커즌선 동부의 폴란드인 2백만명 이상, 루마니아 동부, 핀란드 동부, 발트 3국을 합병했다.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연합국은 공식적으로 1945년 10월 24일에 유엔을 생성하고 1948년 모든 회원국의 공통 표준으로 세계 인권 선언을 채택한다. 전쟁의 수혜자인 연합국 미국, 소련, 영국, 중화민국, 프랑스는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의 상임이사국이 되었다. 서방 연합국과 소련의 관계는 전쟁 후에 급격히 악화되어 전후 유럽은 미국 주도의 북대서양 조약 기구와 소련 주도의 바르샤바 조약 기구의 두 동맹으로 나뉘었으며, 긴 기간 동안의 두 세력은 정치적 긴장과 군사적 경쟁은 냉전으로 전례없는 군비 경쟁과 대리전을 치루게 된다.
 
아시아에서는, 미국은 일본 본토와 태평양의 일본이 점령했던 섬을 점령하고, 소련은 사할린 섬과 쿠릴 열도를 합병했다. 한반도에선 일본의 항복으로 일제 강점기가 끝났지만 일본군 무장해제로 인해 미국과 소련이 1945년부터 1948년까지 38선을 경계로 남과 북을 점령하여 분단이 되었다. 역시 미국과 소련의 대립으로 인해 한반도에서도 남과 북으로 갈라지면서 서로 한반도를 통일하겠다고 주장하고, 북한이 군사적으로 이를 시행함으로써 한국 전쟁이 발발했지만 통일에 실패하였다. 중국에서는, 중일 전쟁에 따른 국공 합작으로 보류됐던 국공 내전이 1946년 6월 재발발한다. 그 결과 중화인민공화국이 세계사에 등장하게 되며, 동시에 기존 중화민국은 타이완으로 이전하며 양안 관계를 형성하면서 분단국가로 남게 되었다. 중동에서는, 아랍은 팔레스타인 분할안에 거부하여 제1차 중동 전쟁이 발발한다. 유럽의 식민지 제국은 식민지를 유지하려 노력하나, 탈식민지화와 전쟁으로 인해 많은 자원 및 인력의 손실이 발생한다. 참전 국가는 다른 영향을 얻었으나, 세계적인 경제는 크게 고통 받았다. 미국은 다른 나라보다 훨씬 부유해졌고, 그 후 1950년대 베이비 붐이 시작되며 국내총생산이 증가하며 세계 경제를 지배하게 된다. 영국과 미국은 1945년부터 48년까지 산업 군축 계획을 세웠다. 때문에, 유럽의 경제 침체는 국제 무역의 상호 의존과 맞물려 몇 년 동안 회복되었다. 1948년 중반 서독의 화폐 개혁과 유럽의 경제 자유화가 가속화되어 유럽 부흥 계획이 1948년부터 1951년까지 진행되었다. 1948년 이후 서독의 경제는 라인 강의 기적으로 회복되었다. 또한,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경제도 회복되었다. 대조적으로, 영국의 경제는 파산 직전에 있었으며 수십 년 동안 영국 경제는 하락세를 보였다. 소련은, 전후 시대의 엄청난 생산력 증가에도 불구하고 매우 큰 인적, 물적 손실을 입었다. 일본은 고도경제성장을 경험하며 1980년대에 가장 큰 경제체 중 하나가 된다. 중국은 1952년에 전쟁 전 산업 생산량이 복구되었다.

전쟁의 총 사상자는, 많은 사상자가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연구마다 그 수가 다르다. 대부분, 약 6천만 명이 사망했고 2천만 명의 군인과 4천만 명의 민간인이 사망했다고 추정한다. 많은 민간인이 전염병, 기아, 대학살, 전략 폭격, 제노사이드 등으로 사망했다. 소련은 전쟁 기간 동안 2700만명의 사람들이 사망하고, 군인이 870만명, 민간인이 1900만명 사망했다. 군인 사망으로는 러시아가 5,756,000명으로 1위, 그 다음으로 우크라이나 민족 1,377,400명이었다. 독소 전쟁 중에서는, 매일 소련 시민 4명이 사망 또는 부상을 입었다. 독일은 530만명이 주로 동부전선에서 사상자가 나왔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전체 사상자의 비율은 거의 대부분 중국과 소련이 사망한 연합국이 85%, 추축국이 15%를 차지했다. 이러한 사상자들은 독일과 일본의 점령 지역에서 거의 대부분 발생했다. 약, 110만명에서 170만명의 민간인이 나치 이데올로기의 직접적 또는 간접적 영향으로 사망하는데, 홀로코스트 기간 동안 유대인 6백만명, 롬 족 5백만명, 동성애자와 기타 슬라브 민족들을 사살했다. 약 750만명의 민간인이 일본 점령하의 중국에서 사망하고, 세르비아인, 집시, 유대족과 함께 크로아티아에서 우스타샤로 인해 수십만명이 사망하고, 이 후, 전쟁 후에는 크로아티아 인에 대한 학살로 이어졌다. 가장 유명한 일본의 잔악 행위에는 약 수백만명의 중국인을 사망시킨 난징 학살이 있다. 약 3백만명에서 천만명의 민간인이 일본 점령기에 사망했다. 히메타 미츠요시는 삼광작전으로 인해 270만명이 사망했다고 보고했다. 장군 오카무라 야스지는 산둥 반도의 헤이페이에서 이 작전을 구현했다. 추축군은 생물학 무기와 화학 무기를 한정하여 사용했다. 이탈리아는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 당시 겨자 가스만을 사용하나, 일본 제국 육군은 중일 전쟁 당시 여러 다양한 무기를 사용했다. 그리고, 할힌골 전투에도 일부 사용했다. 독일과 일본 모두 민간인에게 무기를 사용하고 어떤 경우에는 전쟁 포로에게도 실험했다. 추축국은 이러한 추축국의 범죄로 인한 최초의 재판을 받는 동안, 연합국의 전쟁 범죄는 그러지 않았다. 이러한 연합국 범죄의 예로는, 소련의 인구 이동이나 미국의 킬하울 작전으로 인한 일본계 미국인 수용소, 제2차 세계 대전 후 독일인 추방, 연합국 점령 하의 독일인 강간, 소련의 카틴 숲 학살 등으로 연합국은 이에 대한 책임에 대해 직면하기도 했다. 기근 사망자의 대다수는 전쟁 중 사망자에 포함될 수 있었고 대표적으로 1943년 벵골 대기근, 1944년-1945년의 베트남 대기근 등이 있다. 요르그 프리드리히 같은 일부 역사학자들은 전략 폭격으로 인해 민간인 사망을 포함하며, 대표적으로는 도쿄 대공습, 독일 지역에서는 특히 드레스덴 폭격, 함부르크 폭격, 쾰른 폭격 등으로 인해 160개 도시가 파괴되고 약 60만명 이상의 민간인이 사망했다.

나치는 고의적인 집단 학살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홀로코스트로 인해 유대인 대부분과 2백만명의 폴란드 민족, 장애인, 정신 질환자, 소련 포로, 동성애자, 프리메이슨, 여호와의 증인, 롬 민족을 포함한 살 가치가 없는 생명을 포함하여 약 6백만명 이상이 사망했다. OST 아르바이터의 대부분인 1200만명은 대부분 강제 노동으로 끌려갔다. 나치의 강제 수용소 뿐 아니라, 소련의 굴락은 폴란드,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등의 국민 뿐 아니라, 독일의 전쟁 포로도 수감하며 심지어는 소련의 국민 중 나치 지지자로 보이는 시민들도 구류되었다. 전쟁 중 독일의 소련군 포로의 60%가 사망했다. 역사학자 리차드 오버리는 소련 포로 570만명이 사망했다고 주장한다. 거기에, 전체 시민의 57%가 사망하며 총 360만명이 사망했다. 소련의 전쟁 포로와 송환된 민간인들은 잠재적인 나치 부역자로 인식하고 그 중 일부는 NKVD에 의해 강제 수용소로 구금되었다. 일본의 포로수용소는 노동 수용소로도 이용되며 특히 많은 사망률을 보였다. 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서, 서양의 병사들은 사망률이 27.1%(미군 전쟁 포로는 37%)이고 이는 독일과 이탈리아인의 포로에 비해 7배가 높았다. 일본의 항복 후, 영국군은 37,583명, 네덜란드인은 28,500명, 미국인은 14,473명이 풀러난 반면, 중국인은 56명만 해방되었다. 역사학자 지히펜 주는 1935년부터 1941년 사이에 중국 북부와 만주에서 최소한 5백만명의 중국인이 동아시아 개발위원회(Kōain)에 노예가 되어 광산에서 강제 징용되었다고 주장한다. 1942년 후에는, 그 수는 천만명을 돌파했다. 미국 의회도서관은 자와 섬에서 4백만명에서 천만명이 로무샤가 되어 일본군에게 일할 것을 강요받았다고 추측한다. 27만명의 자와인들은 동남아시아의 다른 일본군 점령 지역으로 이동했지만, 52,000명만 자와 섬으로 송환되었다. 1942년 2월 19일, 루즈벨트 대통령은 미국 행정명령 9066호에 서명하여 수천명의 일본인, 이탈리아계 미국인, 독일계 미국인, 진주만 폭격 이후 하와이에서 일부 도망친 이민자들이 요의 대상이 되었다. 미국과 캐나다 정부는 15만명의 일본계 미국인들에 더하여, 14,000명의 보안적인 위험으로 꼽힌 독일계와 이탈리아계 미국인들도 구금되었다.
 
얄타 회담에서의 연합국의 계약에 따라, 전쟁 포로와 민간인 수백만명이 소련에서 강제 노동을 하였다. 예를 들어, 헝가리의 경우에는 1955년까지 헝가리인에게 강제 노동을 하였다. 전쟁 발발 전 유럽에서, 연합국은 인구와 경제 모두에서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1938년, 서부 연합국(영국, 프랑스, 폴란드 및 영연방 국가)는 유럽의 추축국(독일, 이탈리아)보다 30% 많은 인구와 30% 더 높은 국내 총생산(GDP)을 가지고 있었고, 식민지의 인구를 포함할 경우에는 연합국의 인구는 5:1가 차이나고 GDP는 2:1로 차이가 났었다. 같은 기간, 아시아에서는 중국은 일본보다 인구가 6배 많았지만 GDP는 89% 차이 났고, 만약 식민지가 포함될 경우에는 인구는 3배 차이 나고, GDP는 38%로 감소한다. 연합국의 인구 및 경제의 이점은 독일과 일본의 초기 기습으로 완화되었지만, 전쟁 생산의 차이는 1942년 미국과 소련의 참전 이후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연합국보다 추축국이 종종 더 많은 천연 자원을 가지게 된 경우도 있었지만, 이는 독일과 일본의 여성 노동력에 의해 결정되었고 연합군의 전략 폭격, 독일의 전시 경제 체제 전환과 또 독일과 일본의 지속적인 전시 경제가 정착되지 않아 크게 기여가 되지 않았다. 자국의 노동력을 개선하기 위해, 독일과 일본은 노예 수백만명을 이용하고 독일에서 대부분 동유럽인의 1200만명의 노동력과 일본에서는 극동에서 1800만명의 노동력을 확보하고 있었다.

유럽에서, 점령은 매우 다른 두 형태가 있었다. 서부 유럽, 북부 및 중앙 유럽(프랑스, 노르웨이, 덴마크, 저지대 국가, 병합된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독일은 전쟁 끝까지 약 695억 라이히스마르크(약 278억 미국 달러)을 수탈하고, 이에는 나치 독일의 산업 시설, 군사 장비, 원자재 등의 약탈 물자는 포함하지 않은 수치이다. 따라서, 점령 국가에 대해 40%가 넘는 과세를 함으로써 독일의 소득을 40% 이상 끌어올렸다. 동부에서는, 레반스라움 사상으로 인해 수확이 나오지 않았으며, 전선에서는 소련의 초토화 작전으로 인해 자원이 거의 남지 않았다. 우크라이나 서부에서는, 독일의 인종 정책으로 인해 슬라브 족이 운터멘쉬로 간주되어 과도한 폭력으로 점철되었고, 이는 독일의 제네럴플랜 OST의 원인이 된다. 하지만, 저항 운동이 점령지 곳곳에서 일어나 1943년까지 동부[338] 와 서부에서 독일의 점령을 방해했다. 아시아에서는, 일본은 대동아공영권을 주장하며 아시아를 일본 하의 지역으로 두려고 하고 기본적으로 일본의 패권은 식민지 지역민의 해방을 목적이라고 주장했다. 일본군에게 점령된 지역은 처음에는 유럽 지배의 해방자로 맞았지만, 과도한 폭력적인 점령으로 인해 얼마 안가 저항으로 돌아섰다. 일본은 초기 정복 기간 동안, 약 4백만 베럴(~5.5×105톤)을 점령하고, 그리고 1943년까지 500만 베럴을 194년의 76%나 상승한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로 생산했다. 항공기는 정찰, 전투, 폭격, 지상군 지원 등으로 각 역할이 발달했다. 혁신적인 공수 시스템을 포함하여, 산업 시설과 병사의 사기를 저해하는 전략 폭격기가 발명되었다. 레이다와 독일의 88mm 대공포를 포함한 진보된 대공포로 인해 대공전도 한층 발달되었다. 비록 시기가 늦었지만, 제트기의 발명으로 전 세계의 항공 부대의 표준으로 정착하게 되었다. 해전에서는 특히 잠수함과 항공모함을 포함하여 전적으로 발전되었다. 전쟁 시작 당시 항공공학은 전쟁에서 비록 작은 성공을 거두었지만 타란토, 진주만, 남중국해와 산호해에서는 전함 대신 항공모함이 지배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대서양에서는 호위항공모함이 연합국 호송선단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고, 보호 반경이 효과적으로 늘어나 중대서양 갭이 줄어들게 되었다. 항공모함은 상대적으로 낮은 비용과 중무장의 불필요성으로 인해 전함보다 선호되었으며,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효과적인 무기로 입증된 잠수함은 제2차 세계 대전에서도 중요한 무기로 부각되었다. 영국은 대잠전에서 호송선단의 소나 등 대잠 무기의 개발에 초점을 맞추었고, 독일은 독일 유보트 7형 등을 통해 공격력의 상승에 초점을 두었다. 점차적으로, 연합국은 대잠 탐조등, 헤지호그, 스퀴드, 마크 24 어뢰 등을 개발하며 승리하게 된다. 지상군에서는,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이동성과 통합 무기가 증가하게 되었다. 탱크는 제1차 세계 대전에서는 보병의 지원으로 사용되었으나 후에는 주요 무기가 되었다. 1930년대 말에는 탱크 디자인이 1차 대전 보다 고급화되었으며, 전쟁 중 속도, 방어력, 화력 등이 증가하였다. [함용남 세계전쟁 크리에이터]